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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나와의 접촉 === 사이토는 1963년 선거와 지방선거, 1965년 하원 선거의 결과를 분석한 뒤 국내 통제만으로는 정권의 존속을 담보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경찰 조직을 키우고 공무원 친목회로 충성을 다짐하게 했지만 민심은 이미 떠나 있었고, 1·23 사건 이후에도 대학가의 학생 운동은 오히려 세를 넓히고 있었다. 사이토는 정권을 지탱할 새로운 축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것이 루이나라고 판단했다. 이후의 경위는 선거 직후인 1967년 6월 민주당이 입수해 공개한 이른바 '사이토 보고서'와 관련자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사이토는 1966년 가을 주루이나 북산 대사관을 통해 루이나 당국과 비밀 접촉을 시작했다. 겉으로는 경제 협력과 기술 원조를 요청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선거 관리와 여론 조작, 정보 활동에서 루이나의 도움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하세가와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방안을 건의하고 있다. >루이나 금융 네트워크를 통한 비밀 자금 지원 확보. > >루이나 자문단이 제공하는 선거 관리·심리전 기법 도입. > >루이나 정보기관을 통한 야당·학생 운동 세력 색출 및 약점 수집. > >루이나 해군·공군의 북산 연안 훈련을 명목으로 한 위력 시위 전개. >---- >— 이른바 '사이토 보고서'의 건의 사항 (1967년 민주당 공개 사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하세가와는 처음에 이를 거부했다. 왕가의 이름을 앞세워 당선된 대통령이 외세의 손을 빌리면 권위가 무너진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사이토는 정권의 붕괴가 곧 국가의 붕괴라는 논리를 되풀이했고, 대통령은 결국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고 한다. 증언과 문건에 따르면 이후 루이나 측 인원 소수가 '행정 자문'이라는 명목으로 입국해 선거 관리 기구와 경찰 지휘부에 자문을 제공했고, 신문·방송사 편집국에는 루이나식 심리전 기법이 도입되었다. 다만 이들이 루이나 정부가 공식적으로 보낸 인원인지, 하쿠센 조약에 따라 이미 주둔하던 군사고문단 소속 인원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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